'건강한 선' 긋기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물었다. "왜 당신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해?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놔두면 안 돼?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늘어났다. 어릴 때는 그냥 나 스스로만 단속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혼자만 문제없이 사는 것으론 부족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 투성이다. 


부모님은 노후를 미리 준비하지 못해 걱정이다. 결혼할 때 도움을 받기는커녕, 매달 월급의 얼마씩을 생활비로 보내드려야 한다. 처가댁은 처형의 이혼 후 문제가 생겼다. 부모 없는 어린 조카들이 마음에 걸려 자주 찾아가니, 어느 순간 처가댁 식구 모두 나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다. 주변인들을 너무 신경 쓰다 보니 내 가정생활도 문제가 생겼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부부 싸움도 잦아졌고, 남을 도우려고 했던 나만 피해자가 된 기분이다. 아내 말이 맞아. 왜 나만 책임을 져야 하지?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실력 있다는 심리상담가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가장 시급했던 부부문제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으나, 노련한 상담가는 천천히 내 과거를 파헤쳐 들어갔다. "00씨는 굉장히 독립적인 성향을 지녔군요, 모든 일을 계획을 세워 처리하고 목표에 도달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요... 혹시 책임감이 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보셨나요?" 


이 사람 혹시 점술가인가?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정확히 끄집어내니 의심의 빗장이 풀리고 신뢰가 생긴다. 해묵은 얘기를 모두 꺼냈다. "제 주변 사람들 중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어요, 어떻게든 고민해서 해결방안을 찾아봅니다. 내가 도움이 될 거란 사실은 기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스트레스가 온전히 저에게 전이되는 기분이에요.. 그게 요즘 너무 힘이 듭니다"


"그렇군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솔루션은 이렇습니다. 건강한 선 긋기를 해보세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선을 긋고, 그 선 안으로 나를 침범하는 무언가가 못 들어오게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선 가족들과 거리를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든 문제를 00씨가 처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에너지가 채워지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곳까지 선을 긋고, 그 안에서만 돕도록 해보세요"


전문가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자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다. 퍼주기만 하는 관계는 과감하게 손절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니 모든 게 분명해졌다. "그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만 해보자. 내가 모두를 책임질 필요는 없어,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는 거야..."


이제 내가 생각하는 '책임'이란 '선 긋기' 다. 그 선 안에 들어온 운명은 짊어지고 나아간다. 반대로 선을 넘으면 손에서 내려 놓는다. 내려 놓을 줄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하다. 체력은 늘고 심지는 더 단단해진다. 그동안 낑낑대며 짊어지고 있던 보릿자루가 어느새 요추지지대가 있는 신형 배낭으로 변했다. 무게는 늘었어도 이상하게 가벼운 느낌.. 


모두건강한 선 긋기를 해보자. 삶이 달라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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