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숨은 쉬고 있는데 이게 과연 살아 있는 상태인지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나 역시 수년 전, 사회생활에선 더 이상 목표나 비전 따위는 찾을 수가 없고, 무엇인가 새롭게 해보고 싶다는 의욕마저 상실한 때가 있었다. 거기에 부부생활의 위기마저 겹치니 그야말로 몸과 정신 모두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직감적으로 이건 번 아웃(Burn-out) 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았다. 쉬어도 쉬어지지 않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듯한 기분은 나를 더욱더 동굴 속으로 밀어 넣곤 했다. 주변 사람과의 교류는 자연스레 줄어들고, 일과 가정생활 하나 제 역할을 해내기가 어렵게 되자 우울한 기분마저 밀려왔다


그맘때 즈음 회사에서 새로 짓던 연수원 시설이 완공되어 계열사별로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들어본즉 '명상'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라 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사담당자에게 문의하자 마침 한자리가 빈다며 부서장에게 잘 말해둘 터이니 다녀오라 했다. 4박 5일짜리 합숙 교육이었다



뇌는 '가만히 있어도 지친다


강의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로마 향이 진하게 풍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높고 길게 늘어선 통창으로 저 멀리 바다도 보인다. 편한 요가복 위에 길게 늘어진 가디건을 입은 중년의 선생님이 들어왔다. 명상 경력만 20년. 인도, 네팔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명상법을 배우고 지금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노라 했다


"이제 몸을 쉬게 하는 게 아니라 머리를 쉬게 해줘야 합니다. 뇌는 가만히 있을 때(디폴트 상태)도 대단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뇌를 쉬게 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아무리 몸을 쉬어도 '지쳤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5일 동안 같이 배울 것은 뇌를 쉬게 하는 휴식법. 즉, '마음챙김 명상'입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인 '디폴트 모드'에서도 전체 에너지 중 무려 60~80%를 사용한다(Marcus E. Raichle). 즉 가만히 있어도 디폴트 모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뇌는 점점 지치고 마는데, MIT의 Judson Brewer는 예일대 정신과와의 공동연구에서 '명상'을 통해 디폴트 모드인 뇌 여러 부위의 에너지 활동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명상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뇌 휴식법'이라는 증거를 제시한 사례였다 


아무튼 나는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명상 선생님의 가이드를 충실히 따라보기로 했다. 핸드폰은 수거해가고 숙소에선  TV 조차 볼 수 없었다. 세상 문물과 잠시 단절하니 불안감과 고요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하루는 발의 감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 산을 올라보기도 했고, 또 하루는 모래사장에 앉아 눈을 감고 파도 소리만 들어보기도 했다. 순간 잡념이 떠오르면 내가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오로지 신체의 감각에만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명상 훈련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명상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독 나에게는 '걷기 명상'이 잘 맞았다. 땅에 닿는 발바닥의 감각에만 집중한 체 천천히 걷다 보면 신기하게 잡념이 사라지고 평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잠시 뇌를 쉬게 해주고, 잠자리에 들 때 즘이면 내가 한동안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일들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대수롭지 않았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5일간의 짧았던 명상 교육이 끝이 났다. 그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걷기를 시작한 지 2년 3개월... 이제는 발바닥의 감각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크게 잡념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듯하다. 정신에 안정감이 있으니, 회사나 집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도 큰 문제나 갈등 없이 해결되곤 한다. 이제는 '지쳤다'라는 생각보다는 "해야 할 게 너무 많다"라는 생각이 되려 든다


누군가 "주말에 쉴 때 뭐해? "라고 물어본다면 이제는 단순히 낮잠을 자거나 맛있는 요리를 해먹는다는 케케묵은 답변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 주말은 내 머리를 쉬게 해주는 날이야" 똘끼 섞인 답변에 주변 사람들이 몇 떠나가도 괜찮다. 지쳐도, 상처받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기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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