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자, 그 끝은 우울할지니



얼마 전 집 근처로 이사하신 부모님댁에 전화를 드렸다. "어무니 별일 없수?" 여느 때와 같이 시답잖은 안부를 물어본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심심해 죽겠다,,, " 


자식 모두 결혼해 분가하고, 아버지도 일을 관두시자 부모님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야말로 '무한정의 시간'이 생겼다. 올해부터 공짜로 전철을 탈 수 있으니, 이제 겨우 만 65세의 나이다. 건강만 유지한다면 앞으로 20년은 거뜬히 사실 터다 


문제는 이 엄청난 시간을 확보하고도, 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소위 말하는 '준비되지 않은 은퇴'가 현실로 닥쳤다. 옆에서 봤을 때 경제적인 부분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은퇴였다. 하물며 두 분에게는 이렇다 할 취미조차 없었다. 산업화 세대답게 부모님은 경제 자본을 얻기 위한 싸움과, 자식들의 교육에만 총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당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또 다른 배움과 문화 자본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취미'는 '문화 자본'의 영역에 속한다. 개개인의 취향을 살리면서 동시에 남들과 구분짓기를 할 수 있는 취미와 생활양식에 상류층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과 내가 속한 서민 리그에서는 대부분 그런 투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속된 말로 입에 풀칠하기 바빴고, 집에 가정교사를 따로 불러 바이올린을 배운다거나, 주말에 수상 레저를 즐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하필이면 이런 문화적 품격을 높이기 위한 '취미'는 뒤늦게 학습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정상에 있는 경영자들 다수가 악기 하나쯤은 연주한다. 그들의 자녀는 학교 입학도 전에 클래식 음악 교육을 시작하고 맨 앞줄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한다. 해외로 여행을 가서도 관광지를 찾아 가이드 깃발을 따라가는 대신, 잘 차려입고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며 호텔 수영장과 상급자 스키 코스를 여유롭게 즐긴다. 


문화와 교양의 기회는 시대별, 소득별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이런 불평등은 부분적으로만 돈으로 상쇄될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유명 작가의 그림이나 호화 요트 같은 문화자본을 가질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문화자본인 예술에 대한 이해, 혹은 어렸을 때부터 즐긴 겨울 스포츠 취미 등은 속성으로 따라잡을 수 없다. 그것은 몇 년에 걸친 경험을 전제하므로 문화자본이 풍부한 이들과 똑같은 취향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건너편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를 듣고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도 이미 늦은 건 아닐까,, 나는 어느 정도의 문화자본을 갖고 있는가,,"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위기감이 몰려왔다. 아직 젊다고 할 나이에 무엇이든 배워놔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당장 8살 먹은 내 아이도 이제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다. 훗날, 남들이 대세라고 부르는 대중 취향만을 따라다닐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가꾸고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취향과 취미를 준비해 둘 것인가,,


바로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악기점을 찾아갔다. 오래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아이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흥미를 찾길 바라며 통기타 2개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대면 시대라며 호기롭게 유튜브 독학을 시작했는데, 배우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번 달에는 레저보트 면허 취득에도 도전하고 있다. 둘 다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게 끔, 중간중간 보상장치를 잘 마련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배움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를 테지만, 일정 수준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견뎌내야 할 것이다. 확실한 기본기에서 나만의 기교를 부릴 수 있는 영역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풍요로운 문화자본을 갖게 되고 은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꿈꾼다. '준비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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