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

이준민

다음 두 가지 경험은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경험1

 하루는 친구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를 산책했다. 2011년 11월 경이었다. 사실 옥스포드를 처음 가봤기 때문에 산책이라는 표현보다는 구경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옥스포드 대학 캠퍼스가 곧 동네인 곳인데 동네 복판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것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젊은 남녀 커플이 어떤 무덤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무덤을 깔고 앉는 행위도 불경한데 거기에 앉아서 밥을 먹고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혹시 둘 중 한명의 조상님의 묘거나 친한 사이였던 사람의 묘였을까. 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어떤 상황이어도 죽은 사람의 무덤을 자리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경험2

 일본에서 살았을 때 집 앞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살고 있던 곳을 굳이 서울에 비슷한 곳을 설명하자면 영등포 주변정도 되는 위치였다.(킨시쵸-카메이도 주변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가면 아키하바라다. 영등포에서 몇 정거장 가면 용산인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 곳에 그것도 주거 단지가 잔뜩 모여 있는 곳에 그런 묘지가 있었다. 실제로 도쿄 시내에는 크고 작은 묘지들이 널려 있는데 한국인들이 불편해하는 야스쿠니 신사는 도심지에 있는 큰 묘지다. 일본 블루보틀 로스팅 플랜트가 있는 키요미즈시라카와 역 주변에도 제법 큰 규모의 묘지가 있다. (물론 이곳은 조금 외진 곳이다.) 도쿄 시내 어디를 가든 묘지를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졌다.(집집마다 작은 제단이 있는 것도 어색하지만)

한국 사람은 죽음을 유난히 꺼린다.

 눈으로 본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할 의향은 없다. 다만 이 두 모습은 ‘한국’사람인 내게는 매우 어색한 장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바로 저 문장이다. 한국에서 죽음이라는 건 불편한 어떤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나 '죽음'이라는 개념을 가볍게 여기거나 쉽게 생각하는 곳은 없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을 테지만 한국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유난히 좋지 않은 어떤 것이다. 뉴욕 맨하탄 내에 등록된 묘지 수가 30개 이상인 반면에 서울에서 찾을 수 있는 묘지 수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 손으로 꼽는 묘지 중 하나는 현충원이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시사하는 바는 있다.

 정제되지 않은 주장이지만 죽음에 대한 태도는 곧 해당 사회의 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는 죽음과 관련된 가장 예민한 문화 현상이다. 죽음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종교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기독교 문화는 단테에서 묘사되었듯이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사후 세계를 상정함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규정한다. 불교 문화는 육도윤회라는 세계관을 얘기한다. 과거의 업에 따라 환생하며 현생의 수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윤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을 근거로 불도의 교리는 만들어졌다. 이런 부분들을 봤을 때, 모든 사람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일반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문화가 어떻게 현상(現像)되는지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죽음'을 사유해본 적이 없거나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공간인 무덤을 도심 밖으로 밀어냈고, 죽음이 상존하는 병원과 장례식장을 하얗고 예쁜 건물로 가린 것은 현상(現象)에 불과하다.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일들도 벌어진다. 특히 정치권에서 두드러지는데 어떤 진영을 막론하고 죽은 위인들의 '죽음'을 부정하고 그들이 산 사람들의 정치에 뛰어들게 만든다. '세월호 사건'으로 발생한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 안타까운 죽음은 '죽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광화문의 한 공간으로 장식 되어버렸다.(물론, 한시적인 공간이지만) 아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 도심 한 복판에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공간을 넣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상하다. 죽음을 배척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렇다고 이를 반례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이 아이들은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소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지만 '죽음'이 배제되면 흔히들 말하는 '가치' 있는 것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왜냐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노력'이 가치가 있는 것은 수명이라고 하는 제한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사랑도 그렇고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렇다. 모든 것은 사그라들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죽음'이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사유되어야 하는 이유다. '죽음'이 배제된다면 우리는 눈 앞에 드러나는 현상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것은 '죽음'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주관적인 얘기일까?


Copyrights © 2020 RASHO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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